토가이누의 피 SS
Cool-B 2005 vol.3 수록, 토가이누의 피 외전(咎狗の血 外伝) 재록
전자책: https://www.nitrochiral.com/goods/3045.php
※번역은 <토가이누의 피 외전> 기준
※제목의 時明かり는 '새벽녘이 가까워져,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지다', '우천 시에 이따금 구름이 옅어져 밝아지다'라는 두 가지 의미이나 전자를 우선하여 번역함
서광時明かり
글・후치이 카부라
그림・타타나 카나
그날은 아침부터 줄곧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 낮밤의 구별도 가지 않을 만큼 온종일 어두웠지만, 현재 시각은 오전 2시.
아키라는 작게 한숨을 쉬고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에 한순간 가느다란 빗줄기가 비친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늦지 않나.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상 모토미가 밤을 새우고 돌아오는 일은 드물지 않았지만, 오늘은 간단한 용건이라고 들었다.
무심코 시선이 힐끗힐끗 벽에 걸린 시계로 향하고야 만다.
늦어.
방구석의 조그마한 룸 램프만이 빛나는 방에서 몇 번째인지도 알 수 없는 한숨을 쉬며, 아키라는 창문에 비친 자신 너머로 어두운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파트로 이사를 온 것은 지난달의 일이다. 하지만 몇 달 후면 여기서도 떠나게 되겠지.
다음 취재 장소는 어디가 될까. 최근에는 업무 상황도 순조롭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따라가기만 했던 아키라도, 어시스턴트로서 나무랄 데 없이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토시마에서 있었던 사건으로부터 수 년. 아주 평화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지만 딱히 이렇다 할 문제도 생기지 않는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모토미와 각지를 둘러보는 일은 꽤 자극적이고 즐거운 일이었다. 쭉 이렇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작은 불안감이 때때로 가슴속에서 얼굴을 내민다.
평온이란 있을 수 없다고. 언젠가 필연코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평소 같으면 이런 불안감도 금방 사라지곤 했는데, 오늘은――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부풀어오른다.
불길함에 심장이 뛴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도저히 마음이 억눌러지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버티는 심경으로, 아키라는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그저 비 내리는 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현관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였다.
구두 소리일까. 그런 것치고는 소리가 고르지 않다. 유난히 간격이 벌어져 있다.
의아히 여긴 아키라가 현관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문에 무언가 부딪치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
몸이 굳는다.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다소 어두운 현관에서는 그 후로도 간헐적으로 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강도나 폭력배 부류일까. 숨을 삼키며 조용히 상황을 살피는 아키라의 눈앞에서 잠금장치가 풀린 문이 천천히 열린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낮게 자세를 잡는다. 실내 불빛에 비친 실루엣――그 얼굴을 보고 안도의 숨을 흘렸다.
모토미다.
술에 취해서 발걸음이 불안정했던 걸까. 막 이름을 부르려다가 문득 눈을 찌푸렸다.
모토미는 좀처럼 방에 들어오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여 문에 기대어 있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방울진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빗물이라 여겼으나 방 중앙에 있는 조명을 켜자마자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피다.
「……!? 아저씨……!?」
「아키라, 미안한데 잠깐……, 어깨 좀 빌려다오」
이 상황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목소리. 곧장 달려가 내밀어진 팔을 살며시 어깨에 걸쳐 받쳤다.
코트 아래, 어두운 오렌지빛 셔츠에 거무튀튀한 얼룩이 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핏기가 가셨다.
아키라에게 기댄 채로 천천히 발을 내디디면서, 모토미는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한쪽 눈을 감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ー, 아파라……. 젠장, 화려하게 날뛰어 주셨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도대체」
「음ー, 그게, 살짝 말이지, 아얏……」
――이야기는 나중이다. 지금은 상처를 보는 일이 먼저일 것이다.
자신보다 큰 체격을 신중하게 지탱하며 아키라는 침실로 향했다.
「하ー. 졌다 졌어」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성대하게 내뱉으며, 모토미는 걸터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여행지에서 부상을 입더라도 문제없도록 상비해 둔 구급상자의 뚜껑을 닫으며 아키라도 작게 숨을 내쉰다.
병원도 문을 닫았을 시간이지만, 다행히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다. 오늘은 푹 쉬고, 병원에는 내일 가기로 했다.
오른쪽 옆구리는 칼로 베였다는 모양으로, 지금은 새하얀 붕대로 감겨 있다.
출혈량이 상당했는데도 조금 전까지 생생하던 붉은 풍경이 꼭 거짓말 같았다. 상처를 닦은 수건에 번진 핏물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응?」
「얼버무리지 마」
짐짓 시치미를 떼는 목소리에 드러누운 모토미를 가볍게 노려본다.
이런 상황에서 묻고 싶은 것쯤은 아무리 말주변이 없는 아키라일지라도 명백하다.
구급상자를 사이드 테이블에 다소 거칠게 내려놓고 아키라는 침대에 얕게 고쳐 앉았다.
「으응ー? 어디 보자……」
담배를 쥔 손으로 코끝을 긁적이는 모토미가 태평하게 대답한다.
「지나가던 악당 같은 거 아닐까. 나도 운이 없구만」
――듣자마자 무언가 사건이 있었구나 싶었다.
이렇게까지 시치미를 뗄 때는 이야기하기 곤란한 것이 있을 때이다.
그렇기에 아키라도 진심으로 분노하며 침묵으로 받아쳤다.
시치미 떼는 태도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럴 만큼 심각한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는 모토미에게 애가 탔다.
모토미의 시선이 흘끗 아키라를 스치더니 곧바로 비껴간다. 무언의 사이. 아키라는 결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담배 끄트머리에서 연기가 흔들리며 흩어진다.
쌓인 담뱃재가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빈 맥주캔에 떨어진다. 그 가벼운 소리조차 유독 크게 들렸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긴장이라고도 이완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백 뒤.
「……이런 이런. 못 당하겠다, 너한테는」
모토미가 항복했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빈 캔 가장자리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대로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눈살을 찌푸린다.
「아파?」
「……살짝. 그래도 괜찮아」
침대 끝에서 모토미는 몸을 팔꿈치로 지탱하며 벽에 기대어 숨을 토한 뒤,아키라에게 곧은 시선을 향했다.
「뭐, 상황부터 말하자면. 갑자기 습격당했어. 큰길에서 빠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잖냐, 좁고 컴컴한 거. 거길 지나던 도중에 등뒤에서 당했지」
「얼굴은」
「어두워서 잘 안 보였어. ……다만, 아마 그건」
거기서 말을 멈춘 모토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마?」
「그게, 전에 어디선가 본 얼굴인 것 같아서. ……어쩌면 rabbit 쪽의 누군가가 아닐까 싶은데」
「rabbit……」
――제약 회사, rabbit. 누구나 아는 대기업. 실제로는 토시마에서 일어난 참극의 원인인 연구기관 ENED가 위장용으로 내세운 회사이기도 했다.
「그쪽이 왜 아저씨를」
「뭐, 짚이는 구석은 산더미처럼 있긴 해. 난 진실한 저널리스트니까」
그리 말한 모토미는 익살스러운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왜곡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밝혀내고 싶다――그 일념으로 모토미는 지금의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응당 토시마에서 발생했던 사건 일부까지 가능한 한 폭로해 왔다. 생명의 위협이 닥칠 수 있음을 알고도.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태껏 실제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기 때문에 아키라는 다소 방심하고 있었다. 때때로 가슴속에서 고개를 드는 작은 불안감도 못 본 체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나날이 지나가면 좋겠다――그리 생각하며.
그러나……
「뭐어, 이걸로 또 특종이군. 우량 기업 사원, 무고한 일반인을 습격! 하고 말이지」
「그런 태평한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응?」
자신의 입에서 불쑥 흘러나온 말이 묘하게 평탄한 어조다 싶었지만, 그 생각도 잠시 언제까지고 익살을 떠는 모토미에게 화가 치밀었다.
방금만 해도 큰 부상이 아니었다곤 하지만 그렇게나 피를 많이 흘렸던 것이다.
그렇게나, 피를.
――피를.
「……야, 아키라?」
시야 속에서 옆구리에 감긴 붕대가 흔들렸다.
눈썹을 찌푸린 모토미가 얼굴을 들여다본다.
붕대의 흰색, 그 아래 파묻힌 붉은색. 붉은색을 가리는 흰색――무無의 색.
그 순간 분노가 홀연히 사라지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시각과 의식이 분리되며 마치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안구로부터 투영되는 영상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영상이 안쪽에서 겹쳐져 흘러간다.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 세계. 멀어지는 현실감.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하는 풍경은 아파트의 방 내부가 아니었다.
어둡고 더럽혀진――토시마의, 광경.
「왜 그래? 이봐!」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의식이 삼켜진다. 현기증과 구역질이 소용돌이치며 몰아친다.
버틸 수가 없었다.
「아키라? 아키라!」
눈을 뜨자마자 가장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룸 램프에 어렴풋이 비치는 베이지색 천장이었다.
――토시마가 아니다.
제일 먼저 그 생각부터 떠올린 아키라는 천천히 가슴에 고여 있던 숨을 토해 냈다.
한쪽 팔로 눈가를 가린다. 시야를 차단하자 평소보다 고동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팔에 메마르고 따뜻한 감촉이 닿는다.
「……괜찮냐」
눈가에서 팔을 떼자 부드럽게 내려다보는 모토미의 시선과 부딪쳤다.
「……아저씨, 상처는」
「멍청아. 나보다는 네 걱정을 해라」
약간 기가 막힌다는 투지만 걱정이 역력한 기색으로, 모토미는 아키라의 팔에 대고 있던 손을 이마에 갖다댔다.
「열은 없는 모양이군. 몸 상태는?」
「괜찮아」
「뭐라도 먹을래?」
「됐어」
「그래도 너, 오늘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냉장고 안쪽이며 사재기해둔 식료품이며 나 다녀오기 전이랑 똑같던데」
직업병이기도 하겠지만, 대충대충 넘어가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섬세하게 관찰하고 있다.
묘한 곳에서 감탄하면서도 아키라는 거듭 고개를 저었다.
천성이 이런 건지 먹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은 변함이 없어서, 혼자 있을 때면 해가 질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평소에는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았으나, 과연 오늘은 머리가 살짝 멍하다. 몸속 깊숙이 열감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입이라도 좋으니 일단 뭐라도 먹어라. 잠깐 기다리고 있어」
모토미가 이번에야말로 기가 막힌다는 말투로 일어섰다. 부엌으로 향하려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 갑자기 뚝 멎고, 조금 놀란 얼굴이 돌아보았다.
무슨 일인가 의아하게 여기며 모토미의 시선 끝을 쫓고……황급히 손을 놓았다.
반사적으로 셔츠 자락을 잡아 버렸다. 열 때문에 사고가 둔해져 있는 탓인지 스스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놀려먹겠지.
곧바로 각오를 했으나, 모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온화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내려와 머리를 쓰다듬는다.
「왜 그래, 불안해?」
「…………」
「계속 평화롭게 지내 오긴 했지」
아키라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아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모토미가 다시 침대 끝에 앉는다. 스프링이 가볍게 삐걱거렸다.
셔츠를 걸치고 있는 탓에 옆구리에 감은 붕대는 보이지 않았다.
「뭐어, 어차피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뭐냐, 네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투박한 손끝이 아키라의 뺨을 매만진다.
「말했잖아? 무덤까지 데려가겠다고. 남자라면 두말은 안 한다. 게다가 넌 위태위태하니까ー」
「무슨 뜻이야」
「혼자 둘 수가 없단 소리지. 평소엔 어마어마하게 고집불통인 주제에 묘한 데서 여린 구석이 있으니까」
저도 모르게 반박하려 입을 열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 없었다. 실제로 지금 이렇게 자각도 없이 쓰러진 것이다.
「나도 그래서는 죽어도 못 죽는다고」
웃으며 하는 말에 모토미를 매섭게 노려본다.
「……그만해」
「응?」
「죽는다거나, 그런 거」
가벼운 농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우 듣기 싫은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농담으로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순간 생각했다.
모토미는 일순 멍한 표정으로 아키라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래, 그럴게」
굵은 팔이 아키라의 양쪽 겨드랑이로 파고들더니 신중한 손놀림으로 안아 일으킨다.
안기고 나서 아주 잠깐 저항했으나, 모토미가 약하게 신음했기에 몸에서 힘을 뺐다. 부상자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다만 만약 모토미가 다치지 않았더라도, 지금은 분명 그다지 저항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쩐지 그런 기분이었다.
탄탄한 어깻죽지에 턱을 기댄다. 여느 때 같으면 웬일로 솔직하다느니 뭐라느니 놀렸겠지만, 모토미는 아무 말 없이 아키라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좋아, 그럼 이러면 어떠냐. 나는 죽지 않고. 너도 죽지 않고. 너희 이제 좀 죽어 달라는 소리 들을 때까지, 몇 백 살이든 몇 천 살이든 살아 주자고. 알겠지?」
「그만큼 사는 건 싫어」
「하하, 그러냐」
뺨을 기댄 어깨를 통해 전해지는 모토미의 체온. 몸을 감싸는 체취.
솔직히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쓰러지기 직전에 머리를 스친 기억――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억과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리 치부하기에 그 기억들은 너무나 선명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고 찌를 때마다 금세 통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래도, 괜찮겠지 싶다. 오히려 그거면 되었다고. 수많은 것들을 잃었기에 생겨난 상처들을 모두 끌어안고 살아가겠다. 토시마를 나온 그날 가슴 깊이 그렇게 맹세했다.
그러니 이 아픔도 동요도, 소용없는 것이 아니다. 필요하다. 잊어서는 안 된다.
가슴속에서, 자신의 안에서 지금도 틀림없이 숨을 쉬고 있다는 무엇보다도 큰 증거.
게다가 이렇듯 함께 나누고 의지할 상대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은가.
모토미가 괜찮다고 말한다면, 자신 또한 그에 화답하고 싶다.
믿고 싶다.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스스로가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신기했다.
등을 어루만지던 커다란 손이 살짝 아키라의 턱을 잡는다.
바짝 붙은 거리. 다정하게 가늘어진 눈동자가 감기기를 기다렸다가, 아키라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읏, ……」
맞닿고는 몇 번이고 섬세하게 입술을 맞대는 감촉. 조심스레 밀려드는 혀의 뜨거움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투박한 손가락이 마치 깨지기라도 할세라 살며시, 때로는 조금 난폭하게 아키라의 머리를 껴안는다.
이따금 젖은 소리가 새는 것에 수치심이 일었으나, 서로 얽히고 부딪치는 혀의 움직임에 금세 그럴 새도 없어진다.
「……못 참겠는데, 이거」
키스가 끊긴 사이, 무심코 새어나왔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말에 뱃속이 확 뜨거워졌다.
늘 그랬다. 모토미는 아키라가 싫어할 줄 알면서도 부러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으레 부끄러운 상황에서.
「……이제 됐어」
몸을 떼어놓으려고 팔을 뿌리쳤으나 저항할 여지도 없이 꽉 끌어안기고 말았다.
「놔」
「그래 그래」
「놓으라고 하잖아」
「곤란하지만 헤롱헤롱해서 말야」
「……뭐가」
「아저씨가 아키라한테」
「…………」
말이 안 통한다. 질릴 대로 질린 아키라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조차 떨쳐내듯이 모토미가 작게 웃으며 다시 입을 맞춰 온다.
천천히 받아들이며, 생각한다.
자신은 이 상황을 결코 싫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고양되는 감각을 기분 좋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몸에 닿는 모토미의 손에 안정감을 느낀 것은 언제부터일까.
사람과 사람이란 이렇듯 마음을 나누어 주고, 나누어 받을 수 있다.
이를 알게 된 것도――언제부터였을까.
긴 입맞춤 후, 등뒤에서 삐걱이는 스프링을 느끼며 아키라는 느릿하게 심호흡을 했다.
「늘 생각하는 건데」
「뭐를」
「아키라, 너 요리 못하는구나……」
「…………」
진심어린 목소리로 중얼대는 것을 듣고 있자니 좀 울컥한다.
「그럼 먹지 말든가」
테이블에 한 손을 짚고 모토미의 곁에 선 아키라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준비하느라 바쁘니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건 어디의 누구였던가.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업무 전화가 날아들었다. 아직은 더 쉬는 편이 낫겠다고 말렸지만 중요한 클라이언트라서 거절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창문에서 흘러드는 상쾌하고 맑은 공기에 아키라는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제 내린 비가 거짓말같이 하늘이 화창하게 개어 있었다.
모토미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집안일에도 손을 대게 되었다. 그러나 원체 생활 능력과는 연이 없는 삶을 살았던 탓인지, 도무지 잘되질 않았다.
특히 아키라는 음식에 관해서 없어도 별 상관없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다.
모토미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어떻게든 입을 움직이고 있다.
「이거야 원……, 네 결혼 상대가 고생이겠군」
「아니, 반드시 내가 요리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가사와 육아라는 건 말이다, 어느 한쪽에게만 맡기면 힘들어.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게 중요한 거라고」
입에 던져넣은 물체를 신묘한 표정으로 삼키곤, 모토미는 숟가락을 든 손의 검지를 세워 보란 듯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아이를 타이르는 것 같은 태도가 심기에 거슬린다.
「애초에 내가 누구와 결혼한다는 건데」
「글쎄?」
「…………」
그 대답에 가슴속에서 슬며시 짜증이 치밀었다.
무덤까지 데려가겠다, 의 말뜻은 평생을 해로하자는 것 아니었나. 그렇게 설명했던 건 모토미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키라가 딱히 모토미와 어떻게 되고 싶다든지, 구체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해로한다느니 하는 강렬한 단어를 상상하거나 바란 적도 없다.
그저 가능한 한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한번 그러마고 발언했던 것을 애매하게 얼버무리니 기분이 좋지는 않다.
이대로 둘이 함께 있어도 괜찮은 걸까. 아니면 사실은 괜찮지 않은데도 조심조심 지내고 있는 게 아닐까……어느덧 그런 생각이 들고야 만다.
모토미는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를 얹고 히죽히죽 웃으며 아키라를 올려다보고 있다.
「아ー아, 가엾어라. 네 상대가 될 사람은 얼마나 가엾을까ー」
노골적으로 놀리는 말투에 이번에야말로 짜증이 분노로 바뀌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아저씨」
「응ー?」
「적당히 해」
「뭐가?」
「…………. 그러니까, 적당히, ……!?」
테이블을 짚은 손으로 몸을 뒤로 빼 본들, 갑자기 일어선 모토미의 팔은 허벅지와 겨드랑이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뒷말은 놀라움에 먹혀 흩어져 버린다.
방심했다. 그대로 건져 올리듯 안아들어지고 있었다.
「……읏차, 무거워라. 아야야」
「당연하지, ……윽, 내려!」
모토미가 얼굴을 찡그리며 쓴웃음을 짓는다. 어제 부상당한 직후다. 이렇게 무모한 일을 하니 아픈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얏. 상처가 쑤시니까 날뛰지 마. 뭐, 하여간 말이다. 그런 가엾은 사람은 세상에 한 명이면 족하다고 생각 안 해? 그렇지, 아키라?」
「……뭐가」
「나라면 맛있는 밥도 해 줄 수 있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이 속수무책인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는 데 급급해서, 태평하게 읊는 말의 의미 같은 건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느낌으로 듣지 못했다고 해야겠다.
품속에서 발버둥치는 아키라를 즐겁게 웃는 눈으로 바라보며, 모토미는 빙긋 입가를 끌어올렸다.
「뭣하면, 지금부터 결혼할까?」
「!?」
과연 아키라도 이 말에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바로 옆에 있는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양반은.
……내 요리는 그 정도로 맛없었던 건가. 정신이 이상해질 만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모토미의 얼굴에 순식간에 미소가 번져 나간다.
그 순간 내장이 끓어오를 듯 화가 치밀어서, 모토미의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당장 안겨 있는 품속에서 뛰어내리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그런 반응도 예상했는지, 모토미는 아프다아프다 엄살을 부리면서도 절묘한 밸런스와 힘 조절로 아키라를 품에서 놓치지 않는다.
「젠장, 이거 놔!」
「하하하」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그 소리는, 날뛰던 아키라의 팔이 턱 아래 명중할 때까지 활짝 열린 창 너머 맑게 갠 하늘로 스며들어 갔다.
END
(초출 : Cool-B 2005 vol.3 수록 / 2005년 8월 4일)
「서광時明かり」해설
Cool-B 님께서 게재해 주셨던 SS입니다. 테마는 모토미와 아키라였습니다.
타인의 온도나 접촉에 전혀 관심이 없던 아키라가 모토미의 곁에 있으며 점점 「좋은 것이다」라고 깨닫기 시작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쓰려고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의지해 보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다, 라는 느낌으로.
장래에 대해서도 막연하지만 신경쓰기 시작하고 있으니, 이 부분도 아키라에게 있어서는 제법 커다란 변화려나 싶어요.
마지막의 「결혼할까」는 딱히 그런 말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어느샌가 모토미가 멋대로 말하고 있었습니다(웃음)
모토미는 쓰는 도중에 멋대로 말하기 시작하는 비율이 비교적 높아요. 게임 본편의 「무덤까지 데려가겠다」 발언도 그랬습니다.
제목은 사전에서 「새벽녘이 가까워져,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지다・우천 시에 이따금 구름이 옅어져 밝아지다」라는 의미를 보고 붙여 보았습니다.
(후치이 카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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